JUNBEOM
KIM
애실 愛室
한날 대구 동성로에서 손을 잡고 다정하게 걸어가는 커플 한 쌍이 보였다. 익숙하게 지나칠 법도 한데, 무언가 이질적인 듯 아닌 듯 오묘한 느낌에 사로잡혀 3초간 그들의 모습을 바라보았다. 남자와 남자였다. 길거리에 있는 이성애자 커플들을 제치고, 단연 눈에 띄는 조합이었다.
이런 개인적인 경험으로부터 나는 한 쌍의 오브제를 나란히 놓아두는 작업을 구상했다. 진정으로 사랑하고 사랑받는 한 쌍은 아마 서로의 옆에 서서 한 방향을 나란히 바라보고 있겠지. 때때로 다정한 눈빛으로 서로의 눈을 수줍게 마주보기도 하면서.
프로젝트 <애실(愛室)>의 주된 전략은 우리에게 친숙한 오브제를 간택하고, 그것을 전시장에 전치시켜 낯설게 보이게 하는 것이다. 사물이 지닌 언어를 극한으로 활용한다. 사물이 부드럽게 붙어있거나 단단히 엮여있다.
짝수 물건을 홀수화 하는 것에서, 인간 본연의 ‘짝’을 찾고자 하는 보편적인 욕망에 대해 말하고 있다. 사람과 사람 사이의 이끌림... 홀몸끼리 합일하여 완전하고도 완벽한 짝수가 되고 싶다는 나의 개인적인 염원이 담겨있지만 실현되지 못한다. 이것은 나의 ‘허상의 연인’, ‘이상형’에 대한 강박적 집착이기도 하다. ‘내 물건 옆에 그이의 물건이 나란히 놓였으면 좋겠다.’는 상상을 간혹 한다. 똑같은 물건을 옆에 둠으로써 내부가 아닌 외부의 개체를 사랑하고 탐닉하고픈 나의 욕망이다. 한 사물을 공유하여 쓰고픈 소망을 잔잔한 언어로 풀어내고 있다.
서술되어 있다시피 나는 성과 사랑에 대한 이야기를 계속해서 하고 있다. 다만 내가 겪은 사적인 기억에 의존할 수밖에 없다 보니, 동성애적 사랑에 관한 이야기를 반복적으로 하고 있는 중이다.
이성애자와 게이는 엄연히 "다르다". 내가 직접 만나본 게이들에 관한 특징을 몇 가지 추려서 나열할 수 있을 정도로 이성애자들은 잘 이해하지 못하는 게이들만의 어두운 특성이 따로 존재한다. 일례로 커뮤니티에 온전히 녹아들기 위해선 자신이 쓰는 언어를 더 공격적이고 자극적으로 연마해야한다. 그 화살을 ‘너와 친해지고 싶어서’라는 말 뒤에 숨겨 퍼붓는다. 겉으로는 친구이지만, 사실 사랑을 두고 경쟁하는 라이벌에 더 가깝다. 갑옷을 입지 않았을 뿐이지 남자를 쟁취하기 위한 전쟁터다. 툭 던진 농담에 적응하지 못하는 자는 자연스럽게 낙오된다. 이런 특성에 나를 포함한 많은 동성애자들이 실로 무수히 많은 상처를 받고 마음의 문을 닫거나 절망한다. 나는 이성애적 관점에서 동성애자들을 포용하고 이해하려는 행위를 그다지 달가워하지 않는다. 내 지인 중 몇 명은 동성애가 이성애와 다를 바 없이 완전히 똑같다고 말하지만, 이리 보고 저리 봐도 다른 게 확실하다. 게이 커뮤니티의 특수성을 직접적으로 체감하고 있는 내 입장에서는, 그 ‘다름’을 예술을 통해 적나라하게 세상에 드러내고 싶었다. 가식 없는 가장 솔직하고 진솔한 형태로 세상 사람들에게 우리가 사는 방식을 보여 주고 싶다. 어쨌든 나는 성적 지향성이라는 사소한 차이가 만들어 내는 사회적, 성적, 정신 병리학적 특징에 상당한 흥미를 느끼고 있다. 개방된 공간보단 스스로 폐쇄되고, 숨겨지고, 혐오 받는 포지션에 익숙해져 있는 그들을 양지로 꺼내어 내 나름 구제하는 행위를 예술로 지속하고 싶다.
나 말고도 많은 동성애자 미술가가 존재한다. 허나 기존의 난폭하고 공격적인 어조로 이성애자들을 저격해 미술계를 도발하는 것에는 한계가 있다. 나의 과거 평면 작업이 딱 그랬다. 하고 싶은 말을 양껏 분출하는 것에 집중하다보니 질적으로 효과적으로 들리지 못했던 것 같다. 한마디로 상대를 배려하는 방법을 몰랐다. 이번에 선보이는 애체 愛體 작업은 똑같은 말이라도 부드럽고 자상하게 들릴 수 있도록 속삭이고 있다.

애실 愛室 전시를 보며 남기는 메모
오종원
<애실>전의 오프닝 리셉션이 끝나고, 작가가 집에 들어가는 길에 어떤 느낌을 받을지 괜한 걱정이 들었다. 대체로 많은 작가들이 전시를 마치고 돌아오는 길에 그렇게 허무함이 밀려온다고 한다. 나도 경험한 바가 있어, 리셉션을 마치고 집으로 향하는 작가의 뒷모습에 묘한 무거움을 느꼈다.
사실 기획자이자 작업을 하는 이로써, “이 사람의 작업은 외로움에 기반합니다”라는 표현은 잘 쓰지 않으려 한다. 이유는 뻔한 것이, 외로움이야 모든 창작에 기반이 되는 스테디 셀러이기 때문이다. 밥의 주 재료는 쌀이라고 굳이 표현하지 않는 것처럼 그것을 적나라하게 드러나는 작업을 보게 될 때에는 별로 할 말도 없고, 웬만큼 깊이가 있는 작업이 아니고서는 대체로 평이한 소감을 하게 된다. 더욱이 외로움은 인류의 평생 과제 같은 것이라 어지간히 표현만 하여도 대중의 공감대는 호소할 수 있을 것이라 생각해 별도의 말이 필요하지 않다고 본다.
그러나 피그헤드랩에서 <애실>전이 열리게 된 계기에는, 작가인 김준범의 외로움이 보편성과 거리를 두고 있기 때문이다. 퀴어로서의 외로움. 아직도 한국 사회에 도전적인 한 영역이자 작가 자신을 처절하게 괴롭힐 그 감정을, 정작 자신이 사랑받기 위한 도구로서 계속하여 타인에게 호소하고 있다. 이 과정 자체가 그만의 고유한 전략은 아니겠지만, 그는 상처와 관심의 사이에서 아슬하게 줄을 타는 것처럼 보인다.
작가를 처음 만나게 된 것은 그가 자신의 포트폴리오를 돌리는 과정 중이었다. 사실 포트폴리오만 봤을 거라면 그저 적당히 잘 그리는 작가 정도로 생각하고 말았을 수도 있었다. 그러나 작가는 자신이 가진 상대적 특수함을 창작의 매력으로 어필하고자 하였고, 그렇게 해서라도 빨리 기회를 얻고자 했다. 나름 간만에 보는 당돌함이라 생각하며 그에게 전화를 걸어보았고 그게 지금의 전시까지 이어지게 되었다.
이번 전시는 그가 처음으로 도전하는 오브제 작업(그는 이를 조각이라 표현하였는데, 그 말도 맞는 것 같다) 6점과 아티스트 토크를 준비하며 녹음한 미디어 작업 1점으로 구성되어 있다. 전시를 준비하며 기존의 작업과 결을 달리해 보자는 제안에 그는 성실히 또 적극적으로 응해주었다. 나름 조심스럽게 접근하였던 내 생각을 웃도는 듯 그의 신규 작업과 아이디어는 매우 설득력이 있었다. 특히나 외로움을 스킨쉽의 개념으로 표현하고자 하는 그의 표현들은 꽤 간결하고 담백하였는데, 마침 아티스트 토크를 진행하며 그가 보여준 과거 연구작을 보게 된다면 이게 얼마나 큰 발전인지 느낄 수 있을 것이다.
오프닝 리셉션 전 진행한 그의 아티스트 토크에서는 그의 외로움이 나름의 여정과 상처들 속에서, 위험하고 불안정하게 존재하였음을 보여주는 자리였다. 지금도 한참 젊은이이지만, 불과 몇 년 전만 하여도 그의 작업은 (비록 불가피한 상황일지언정) 힘의 논리를 통해 외로움을 충족시키고자 하는 것처럼 보였다. 그것은 어떤 카타르시스 같은 것을 내포하기도 하면서 동시에 꽤 위험해 보였는데, 무엇보다 작가가 그 폭력성을 스스로 감당하지 못할 것처럼 느껴졌기 때문이다.
몇 년이 지나며 자신을 온전히 이해할 수 없는 세상과, 그 안에서 자신을 안아줄 이를 찾아 나서는 그의 여정은 나름 어떠한 형태를 찾아가고 있다. 아픈 만큼 성장한다는 것이 맞는 말일까. 이번 <애실>전에 선보인 그의 작업들은 과거 연구작과 의미적으로 또 형태적으로 확실히 달라졌다고 느껴진다. 언어를 바꾸고 말을 줄이며 색깔을 소거해 나갔다.
이번 전시의 포스터 이미지이기도 하지만, 메인 아이템으로 보여 지는 작업은 <애체_ 베개 두 개>이다. 처음 기획과정에서 아이디어를 듣자마자 “바로 이거지!” 하고 손뼉을 쳤을 정도로 기대가 되었고, 또 이번 전시의 중심이 될 것이라 생각하였다. 순백의 베개가 서로 엮어져 주름이 지고 볼륨을 보이는 모습은 마치 하얀 대리석 조각처럼 느껴지기도 하였다. 또 그것이 한 쌍의 덩어리를 이루는 것은 작가가 그동안 외쳐온 스킨쉽이 육체적인 해소만이 아니라 마음까지 안아주는 포옹처럼 느껴지기도 했다.
작가를 실제로 보면 더욱 느낄 수 있는 것인데 늘 불안감과 두려움, 그리고 상처와 괴로움 속에 있는 이가 힘이 아닌 애절함으로, 복수가 아닌 그리움이라는 형태를 취하는 것이 얼마나 많은 고민을 바탕으로 했을지 상상해볼 수 있었다. 이 표현을 지금 쓰면 너무 과할까 고민하였는데, 성(性)이 수양을 거쳐 성(性)을 지향하는 것처럼 느껴져 은근히 감동적이고 여운이 느껴지기까지 하였다. 나는 이 작업이 아까워서, 이번 전시 말고 다음에 더 큰 기회 때 공개하는 것은 어떨까 제안하기도 했었다.
이 외에도 운동화 두 켤레, 한 쌍의 넥타이 고리 등의 작업들도 그 나름의 수양과 미학이 만나는 지점들을 보여주고 있다. 줄이 엮이고 고리가 서로 물리면서, ‘쌍’을 이룬다는 것이 단순히 두 개가 함께 있는 것 만이 아니라, 또 다른 무엇인가로 의미가 변화함을 보이는 것 같다. 그래서 ‘쌍’과 ‘켤레’라는 단어는 두 개를 표현하면서 동시에 한 개가 되었음을 선언하기도 하나보다.
물론 아쉬운 지점들도 없지는 않다. 가령 이번 전시의 메인이 되는 베개 두 개의 경우, 아이디어에 비해 다소 퀄리티와 구성에 아쉬움을 느끼기는 한다. 좀 더 여물었을 때 공개하는 것은 어땠을까. 또 면도기 작업은 다른 작업들에 비해 의미상으로 동떨어진 듯 하고, 여벌의 옷 작업은 다소 마켓을 의식한 것은 아닐까라는 생각도 들었다. 그러나 이런 시도들이 작가가 취해본 도전의 나열 같아서 전체적으론 재밌다는 생각은 든다.
마지막으로, 이번 전시를 함께 준비하는 과정에서 작가가 조금 마음의 여유를 가졌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몇 번 하였다. 물론 젊은 작가의 성급함이란, 그에게만 해당 되는 것도 아니며 꼭 단점이라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더욱이 전시의 형태가 나름대로 괜찮게 나왔다고 생각하였을 때 굳이 언급할 필요가 없을 수 있다.
앞서 서술한 데로 작가의 삶은, 앞으로도 수없이 마주쳐야 할 많은 모험들 속에서 괴로움과 상처들로 가득할 수도 있을 것이며 그러한 만큼 인정받음이 필요할 것이다. 그래서 작가는 자신의 눈 앞에 있는 것에 엎드려 기회를 노리고, 그의 눈 옆으로 지나가고 있는 것에 굳이 여유를 가질 틈이 없어 보인다. 나는 그에게 안식처를 제공할 수 없다. 또 그럴 마음도 없고. 그저 피그헤드랩이라는 공간 안에서 그만의 작은 성전을 만들어 낸 것을, 나는 관련인이자 목격자로서 기억하고자 한다. 그게 내가 해줄 수 있는 최대한의 친절일 것이다.